오랜 시간을 들여 해석된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노잣돈은 책으로 주십시오. 입에다 책을 물려주시고요. 책의 무덤. 돈과 바꾼 무덤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고 싶습니다. 무덤이 더 호화로웠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금칠했고요. 내가 죽으면, 책을 함께 묻어준다고 말하고, 절판본들을 빼돌려주세요. 책은 그들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

화제 전환은 소화기를 뿌리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이야기에 흙을 뿌려서 질식시킨다. 화재진화. 새로운 전통에서는 불씨를 꺼트리는 것이 미덕이다. 항상 불을 끄고 다니세요. 타다 만 것들, 빛이 나지 못한 것들, 재가 되지 못한 것들, 오직 그을음만을 남긴 것들은 모두 질식한 것들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잠재우고 여기까지 왔다. 다만 불씨가 숨 쉴 권리에 대한 문건들만은 모두 불타버렸다.

사람에게서 한 번에 한 면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데, 얼굴은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앞이면서 뒤일 수는 없다. 동시에 옆일 수도 없을 것이다. 다면성은 시간 속에서 드러나며, 한 얼굴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전면에 드러난 것이 있으면 나머지는 배면으로 들어간다. 웃으면서 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언제나 웃으면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늘 웃는 동시에 울 수 있다면, 동시에 재주를 부리면서 시를 읊을 수 있다면 그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표정이 서로를 반박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런 그의 얼굴을 읽을 수 없다. 전면은 배면으로 들어간 것들의 침묵에 의해서 비로소 성립한다.모든 것이 동시에 전면으로 나와서 떠들기 시작한다면 그는 너무 혼란스러운 존재로 보일 것이다. ..

글에서 있을리가 없는 체취를 찾고, 그것을 지우려 노력하는 경험을 누군가는 평생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자신만이 아는, 지독한 악취. 이 잡듯이, 실수를 찾듯이, 범행 현장의 흉기를 찾을때처럼 내 말을 한글자씩 뜯어보았다. 도대체 이게 여기에 이렇게 붙어서 왜 그런 뉘앙스가 되어버리는 걸까. 말의 냄새가 나에게는 너무 뚜렷한데. 너에게 물어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렇다고 생각하면 왠지 그래보이는게 말인데. 징그러운 것들을 자꾸 찾아낸다. 문장의 피부 아래를 기는 것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들. 그러한 괴질들. 모든 환상적 병균들이 문장 아래에 창궐하고 있다. 그걸 들춰보는 것은 나만의 소일거리다. 없겠지. 오늘은 없겠지. 아니, 있었나. 거무스름한, 기어간 흔적이 정말로 기어간 건가..

내가 좋아하는 레파토리는 믿음과 소망과 용기에 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한 다음, 모두가 길을 찾는 해피 엔딩을 이야기한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동화를 계속 구연하고 있다. 헤맨 것들은 돌아가야한다. 나는 그들이 미래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모든 것이 웃으면서 돌아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평화를 상상한다. 그래서 텅 비어버린 천국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천국이 이 땅과 겹쳐지는 때에, 그 곳은 아마도 조용하게 비어있을 것이다. 그 때, 모든 것은 제 자리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천국은 권력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그 권력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고, 우리의 존재를 깨끗하게 지우고 태우는 불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불길은 영혼만을 남..

정병을 인지하면서 생겼던 가장 큰 변화는 뭔가에 엮이는 것을 극도로 피하게 됐다는 건데, 하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을 피하려고 무엇이든 관여를 안 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걸 내가 바랐던 것은 아니고. 비자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들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실 원래 내가 어느만큼 할 수 있었는지는 의미가 없고 내 capacity라는 걸 새로 인식해야하는데 그게 정말 말도 안 되게 작으니까 자존감도 떨어지는 것임. 나는 이 정도의 그릇인가하고. 기회들도 다 거절하면서 점점 제안도 안 오게 되고. 그런 악순환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다고 욕심대로 일을 벌려놓으면 그것 때문에 가뜩이나 스트레스 관리 안 되는 상황에서 내 용량을 넘어가는 일도 자주 있을거고,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