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미 자기 안에서 매듭지은 일은 전처럼 매달리지 않으니까. 하고 싶지만 하지 않았던 것을 해보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고 그걸 해보지 않으면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세상에 다 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해볼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건 그래서 다행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앞으로 나아가면 그 앞이 계속해서 존재하므로. 그리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의 수도 한 사람이 평생 가볼 수 있는 길보다 훨씬 많다. 세상은 사람에게 항상 다 탐구할 수 없는 곳으로 남는다. 나보다 세상은 항상 큰 곳이고, 내가 모르는 흥미로운 것, 알지 못한 비극들이 어디에나 있으므로 그 모든 것과 마주치고,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주어지길 바란다. ..

"금이 간 곳은 빛이 들어오는 길이다. " 반대로, 금 간 곳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언어라는 문풍지로 그것을 끝없이 막으려는 절망적인 노력으로 글쓰기를 규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막아도 막아도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조각난 세계를 어떻게든 이어맞추고 메꾸려고 하지만 조각은 항상 모자라고, 언제나 춥다.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라는 방에 갇혀 있는 것이고, 그에게 실외는 늘 두려운 곳이다. 그에 비해서 금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는 것은 나에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언어라는 문풍지로 바람을 막는다는 방어적인 상상은 고통을 두려워해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노력인데 이미 실패했고, 늘 실패할수밖에 없다. 세계가 나를 포위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바람이 계속 침습해들어온다. 초과하는..

내 자신이 때때로 이동하고 있다는 감각에 예민해지는 시간이 있다. 문득 내가 있던 자리가 어느새 저 멀리에 있는 것을 확인할 때. 지난 화두가 낡은 것이 되고, 새로운 화두가 마음 속에 자리잡은 것을 알게되었을 때. 그리고 그 새로운 화두가 조금도 낯설지 않을 때. 그런 여행은 이미 지난 영토를 다시 걷는 경유지에서의 기시적인 체험 역시 함축할 것이다. 잘 아는 경계를 지나 낯설어진 풍경 A'으로의 재진입을 표시하는 새로운 악장의 서두들. 무심코 지나쳤던 의미심장한 개요가 이전에 방황한 다른 영토에서의 기억들로 정당화되며 이어질 B'또는 C를 예고한다. 경유지로 회귀할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이 연주는 어느 경우에도 앞으로 영구히 반복될 A라는 원점에 대한 기나긴 주석일 수 밖에 ..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뻗었고 그때마다 손가락 사이에 별들이 스쳤다. 한 움큼 쥐었던 흰 강물은 곧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자꾸 밤이 스며들었다. 다시 검은 강에 손을 수도 없이 담갔으나 작게 깜박이는 것들이 두 손에 담기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 검은 물 속에서 붙잡은 깜박이는 것들은 우리의 주의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만 반짝인다. 문득 그것들이 빛났다는 검은 잔상이 시신경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검은 윤곽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의 이름은 정확히 모른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말들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뛸 것 같다. 밤에는 오탈자를 교정한다. 낮에 정신 사납게 어지른 모든 것들을 정리 정돈한다. 오자를 지우고. 단단한 것은 남기고. 말들의 간격을 조정하고. 그런 작업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건 내 척추를 똑바르게 교정하는 일이다. ** 방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타자를 두드리면서 일기를 적는다. 일기를 적을 내용이 없으므로 - 아니면 일기로 남기고 싶은 것은 단 하나도 없어서 - 문장에 대한 말을 한다. 말할 것이 없으니까 말에 대한 말을 하고, 그 말들이 장벽이 되어서 나를 지켜주길 바란다. 말들에 둘러싸여서 생각한다. 이 말들이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지켜줄까? 말들은 말없이 둘러싼 채로 대답을 거부한다. 말들이 침묵한다. 말에게 말을 걸고,..

나는 내 리듬이 깨지는 게 싫다. 영원히 하나의 리듬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변주하고, 돌아오고, 또다시 변주하고, 잠시 낯선 곡을 연주하다가 다시 가장 마음에 드는 리듬을 되풀이하는 것. 낮에도 언제나처럼, 밤의 리듬이 계속되면 좋겠다. 누군가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어디든 날아다니면서 밤을 쫓아다니고 싶다. 영원히 밤을 날아가는 비행도 있을 것인가?